'좋은 문체란 세계를 꾸미는 것이 아니라 명료하게, 깊게 통찰하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어디에선가 인용하여 적어 놓은 글이다. 아마도 '좋은 문체'대신 '좋은 작업'내지는 '좋은 작품'으로 생각해도 좋을 법 하여 옮겨둔 모양이다.
'좋은 작업이란 꾸미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명료하게, 깊게 통찰하여 펼쳐 보이는것이다.'
내게 있어 바람직한 작업이란 적절한 책략과 기교 등으로 작품을 '만들기' 보다는 '보이는 세계를 평쳐보임' 그리고 '미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게 함'으로써 새로운 공감을 얻어내는 일이라고 본다. 공감대의 형성이야말로 우리들의 연결끈이 되는 것이니까.
어느 선생님의 말씀처럼 잘 보려면 다양한 거리 이동이 필요하다.
원거리는 물론 클로즈업도 필요하다. 다양하게 보는 방식은 내가 사용하는 재료, 형식, 기법 등에도 작용되기를 원한다. 내게 익숙한 실, 섬유, 펄프 등은 물론 주변의 인공물, 자연물, 폐기물 등이 열린 시각으로 선택되고 그들을 통해 다양한 이야기를 끄집어내고 싶기 때문이다.
언젠가 우리가 얼마나 많은 정보통신망 속에 뒤덮혀 살고 있는지를 새삼 느꼈던적이 있다. 높은 산 위에 치솟아 있는 송수신기들, 집집마다 건물마다 자동차마다 무수히 꼿혀 있는 안테나들. 그것은 일종의 상징물처럼 보였다. 나는 무수한 안테나들을 머리에 꽂고 어디론가 망연히 걸어가는 한무리의 사람들을 떠올렸다. 도대체 우리들이 감지하고자 하는 무수한 정보들이란 과연 무엇일까?
그즈음 솟대에도 눈이 쏠렸다. 일종의 안테나라고 할 수있는 솟대의 의미와 상징은 무엇일까? 이러한 의문으로 사물을 살펴본다는 것은 어쩌면 전통과 현대의 의미를 되짚어보는 좋은 단서가 될수 있다. 나는 어느 시대의 문화가 그 시대 속에서는 어떠한 존재가치를 지니고 있었고, 또 그것이 어떤 모양으로 현대화했는지를 즐겨 비교해 본다. 정리되지 않은 채 버려진 옛 물건도 각자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난 옛 것에 대한 향수를 찾느라고 그것들에게 접근하는 것이 아니다. 내게 관심있는것은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들이 '내면의 깊이'에 어느 정도의 변화를 가져오는가, 변화와 발전이란 무엇인가, 이러한 시간의 흐름을 뛰어넘는 공감대란 무엇인가 하는 것들이다. 나의 작업은 이러한 질문으로부터 시작한다.
미술공예 1993.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