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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NAH 현대미술프로젝트
RECYCEL




<물러선 대지>

안녕하세요? 작가 이영희입니다.
돌이켜 보니
저 또한 어수선한 삶의 틈바구니에서
그럼에도 작업을 바라보며 때로는 무겁게, 느린 걸음으로 걸어왔습니다만
그것이 그리 짧지 않은 시간이었음을 이 오래된 하늘정원에서 다시 느낍니다.

발길이 멈춘 닫힌 창문 안에서 어느 순간 멈춰 버린 듯한 이곳 하늘정원,
이곳의 사물들은 묵묵히
눅진한 습기로 쌓인 시간들을 버무려
제 몸에 곰팡이들을 피우는 중이었습니다.
떠도는 작은 먼지들을 한껏 모으는 중이었어요.

그리하여 무언가로 되돌아가거나
어디론가 물러서 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사실 그대로 멈춘 것은 어떠한 것도 없었던 것입니다.
모든 것들이 진행 중 ing이었어요.
멈춘듯한 이 모든 것들이
사실은 사라져가느라 치열하게 애쓰는 중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오랫동안 닫혀있던 창문을
가만히 열어보았습니다.
놀란 듯 먼지 덩어리들이 튕겨 올라왔지요.
구석에 던져진 빗자락을 집어 들고
천천히 벽면을 쓸어보았습니다.
곰팡이가루가 날리고, 검푸른 검버섯 흔적이
벽면 여기저기 나타났습니다.

그건 필시
돌아가시기 전 무수히 피어있던 어머니 살갗의 검버섯들이었습니다.
코를 덮은 마스크 밖으로 나의 숨결이 작은 방안에 가득하였습니다.
저는 언젠가 우리를 썩힐 그 시간 속에 나의 눈길을 천천히 보내기로 하였습니다.
낯설지만 호기심 가득한 눈길로 말이지요.
저는 죽은 자들을 방문한 따뜻한 손님이 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작업실로 돌아와
저의 작업 공간을 오래 바라보았습니다.
날짜들이 적힌 표식은 작품의 연대기처럼 단단히 포장된 채,
모퉁이 공간 틈새마다 숨을 죽이고 저를 기다리는 중이었습니다.
저는 숨통이라도 튀어주려는 듯,
포장을 벗겨내기 시작했습니다.
초봄의 농부들이 씨앗을 뿌리기 위해 대지를 갈아엎듯
포장 박스를 숨가쁘게 뒤집어 꺼내기 시작하였습니다.
몇 겹으로 쌓인 신문지와 포장 종이, 벗겨진 비닐 사이에서
나의 시간들이 다시 가쁜 숨을 몰아쉬며, 깨어난 듯 했습니다.
그들은 나만의 부빌 언덕이 된 채로
나의 대지가 되어 발아래 그렇게 다시 놓여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변함없이 놓인 나의 대지,
버무린 왕겨들의 대지,
떠오를 만큼 가벼워진 나의 대지들,
저는 그 거친 표면을 가만히 쓰다듬었습니다.

뿌리를 달고 날아오르는 자그마한 대지 조각들은
수많은 시간들을 끌어들이고, 흩뜨러뜨리고, 무시하고, 무시된 채
이리저리 떠다니는 많은 이야기들을 풀어 헤치는 듯하였습니다.
저는 한껏 고무되어 남녁의 붉은 황토들을 자루에 가득 담았습니다.

그렇게 나의 대지는 움직이는 대지가 되어
2023년 봄, 붉은 황토 흙덩이들과 함께
이곳 속초, 설악산 아래 하늘정원에 다다랐습니다.
그리하여 깊숙한 바닥 아래로 함께 물러서며,
방과 방 사이 무한의 통로로 가는 입구일지도 모를 이곳에서
죽은 자들을 방문한 따뜻한 손님이 되어
물러서는 시간들을 기꺼이 만나기로 합니다.

아, 저기... 움직이는 대지,
물러선 대지의 조각들,
그 틈 사이로 무언가 보이지 않나요?
초록의 싹이네요.
이 대지는, 버무린 왕겨더미들의 틈새에서
다시 초록의 싹을 내밀었어요.
언젠가 이곳, 여기를 뒤덮을
순결한 숲의 첫 싹들이네요.

잠깐!
초록의 싹들에 물을 뿌려주어야 겠어요.
거기, 지나치는 당신, 잠깐 시간 좀 있으신가요?
함께 물 좀 뿌려주세요.